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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사회 <맥베스> (2015) 리뷰 영화 리뷰


뉴욕으로 와서 처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매주 연극만 거의 3개 정도 보는 꼴이라 차마 영화까지 챙겨볼 시간은 많지 않은데,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영화화된다고 해서 몇 년 전부터 기다려 왔거든요. 게다가 Shame에서 이미 연기력을 확인한 마이클 패스벤더와, 프랑스 미인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마리옹 꼬띠야흐가 등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손꼽아 기다렸는데 마침 The Shakespeare Society에서 시사회에 초대해주어 다녀왔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지라 엄청 기대치가 높았는데, 저의 기대를 마구 마구 무너뜨려버렸습니다...

(눈물 좀 닦고 얘기할게요.)

영화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인 맥베스가 어떤 전투에 나가는지, 던컨 왕이 이끌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정치 상황이 어떠한지에 대해 검정 배경에 빨간 글씨, 그것도 촌스러운 폰트로 요약본이 올라옵니다. 이 때부터 뭔가 불안했어요. 스크립트에는 주석이 달릴 수 있어도, 영화나 연극에 주석 달려 있는 걸 좋아라 하지 않거든요.


스틸샷을 구할 수 없었는데, 영화 속에서는 아무런 대사 없이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죽은 아기 사체부터 등장합니다. 아들을 낳은 모양인데 얼마 되지 않아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요, 그리고 나서 맥베스가 피투성이인 전장터에서 싸우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슬로우 모션 많고요, 자욱한 안개에, 이해할 수 없는 메이크업을 한 맥베스가 등장하죠. 그러다가 4명의 마녀도 조금씩 나오고요. (여기부터 또 이해가 불가능 했어요. 왜 3명의 마녀를 굳이 4명으로 바꿨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끝까지 제시해주질 않더라고요. 근데 이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니예요.) 


이 메이크업은 대체 뭔가요. 영화 컨셉 자체가 최대한 역사적 사실과 근접하게 연출하려는 것 같은데 이 메이크업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목적도 파악이 불가하고. 흠. 

게다가 마리옹 언니도 이상한 메이크업을 해줬어요.


설마 저 퍼런 아이섀도우를 눈두덩을 기준으로 해서 얼굴에 수평으로 좍 그어놓은 것을 2015 f/w 메이크업 트렌드가 되리라고 예측하고 하신 것이 아니길 빌어봅니다. 

영화가 너무 별로였어서 길게 리뷰를 쓰고 싶은 욕구도 안 나네요. 
영국 평론가들에게는 별 3-4개 사이를 받았던데 제 생각엔 성의를 보아 한 2개 정도 주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영화의 최대 묘미는 영상미고요... 
.......... 그게 끝이예요.

셰익스피어 극본을 많이 손대지 않고 시나리오로 만들었는데 문제는 말이지요... 거의 모든 대사를 속삭이는 정도에 그치거나 보이스오버 처리를 했어요. 그래서 그 어느 캐릭터에게도 감정 이입이 안 되요. 살인이 일어날 때도 아무런 감흥이 없고,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에서도 전. 혀. 죄책감이 느껴지질 않아요. 

그리고 이건 매우 개인적인 취향 문제이긴 하지만, hand-held 기법으로 많이 촬영을 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속이 울렁이기도 했어요. 

영화를 보며 느낀 점은 연극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것이었죠. 이렇게 우수한 두 배우를 데리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다니, 잘못은 전적으로 감독인 Justin Kurzel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액션 영화를 좋아하고, 영상미만 있으면 장땡이다! 
이런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 이 영화를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등장하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나 일부 장면들이 낭비라고 느껴질 정도로 영화는 굉장히 단조로웠어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이렇게 지루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마치 배우들의 극본 전체에 워터마크로 "sotto voce (소리를 낮추어)"라고 써놓은 듯 했어요. 
그리고 그냥 영화 감독이 "나 이런 기교도 쓸 줄 안다!" 이걸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영화 같았고, 전혀 지능적으로 다양한 기법을 사용했다는 인상은 들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텍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는 것이 철저하게 드러나는 영화였습니다.

검색해보니 이 영화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마이클 패스벤드와 Assassin Creed라는 비디오 게임을 영화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던데, 아마 액션 영화 만드는 걸 좋아하는 감독인 것 같아요.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많이 거슬리실 것 같아요. 어째 영화로 각색된 것 중엔 맥베스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네요. 원래 연극이었던 것을 영화화한 Rupert Goold 감독의 2010년 버전이 제일 성공적이었던 것 같아요. 

Rupert Goold 감독 연출작 (2010).
패트릭 스튜어트가 맥베스, 케이트 플릿우드가 레이디 맥베스 역을 맡았습니다.




여튼, 기대를 참 많이 했던 작품이었는데 풍선 바람 빠지듯 확 꺼져버렸네요. 
영화를 보는 내내 손목 시계로 시간 확인하며 도대체 러닝 타임이 얼마나 길까 생각하는 것도 처음이었어요. 

사실 제가 셰익스피어를 워낙 좋아하는 터라, 셰익스피어 작품을 볼 때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보려고 노력해요. 텍스트 자체가 워낙 우수하다보니 무대나 영화로 옮겼을 때 더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이번에도 안 그러려고 갖은 노력을 했는데 어째 감독님이 안 도와주시니... 

제가 보기에 감독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영화화 하고 싶었다기 보단,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더불어 마이클 패스벤더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하고 싶었던 차에 맥베스가 떠오른 것이 아닌가 싶네요. 

셰익스피어 희곡의 영화 버전이라는 생각은 그냥 버리시고요, 2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을 버틸 수 있고, 영상미를 만끽하고 싶은 분들에게만 추천해드립니다. 


덧글

  • 2015/11/23 18:4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zebraorchid 2015/11/23 23:10 #

    저는 사실 텍스트가 많이 보존되었다는 점 때문에 더 배신감을 많이 느꼈어요... 차라리 텍스트부터 난도질(?)을 했으면 이런 배신감이 덜 했을 것 같은데 텍스트는 예쁘게 보존해놓고 대사를 다 귓가에 속삭이는 양 치게 만들다니 이게 뭔 짓인가 싶더라구요. 제가 영어를 전혀 못 알아들었으면, 눈 감고 들으면 어느 부분 대사인지 거의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일관된 톤으로 대사를 읊더라고요... 연회 장면부터 살짝 차이가 나긴 하는데 거기까지 가려면 일단 한 시간은 넘어가서 벌써 진이 다 빠진 상태고.

    워낙 셰익스피어 작품은 제가 꼬장 꼬장한 태도로 보는 안 좋은 습관이 있어서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보려고 제자신을 세뇌하고 가서 봤는데도 이랬네요... 차라리 조금 더 자유롭게 각색했다면 나았을 것 같은데, 감독의 스타일을 텍스트에 억지로 강요한 기분이 들었어요. 텍스트와 감독의 스타일이 와인과 치즈마냥 궁합이 맞아야 하는건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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