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만과 편견>에 등장했던 도자기 인형마냥 곱고 예뻤던 키이라 나이틀리를 기억하시나요?
키이라 나이틀리가 드디어 브로드웨이에 데뷔했습니다.
프랑스 작가인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켕>을 각색한 연극으로요.
(박찬욱 영화 감독님도 테레즈 라켕을 기반으로 <박쥐>라는 작품을 탄생시켰죠. 이상하게도 한국보다 외국에서 평이 더 좋더라구요? 저는 무서운 걸 잘 못 봐서 아직 관람하지 못 했습니다.)
내용은 정말 간단한 치정극입니다.
테레즈 라켕은 부모를 여읜 고아라서 숙모의 손에서 자라고, 성인이 되자마자 같이 한 집에서 자란 사촌 까미 라켕과 결혼합니다. 물론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해서죠. 테레즈는 까미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고 "압화마냥" 건조한 삶을 삽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까미의 절친한 친구 로랑을 만나는데, 로랑을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하고 둘은 불륜 관계에 빠집니다. 심지어 이 둘은 까미를 살해하고 둘이 결혼해서 살자는 결심을 합니다. 그 결심은 행동으로 이행되고, 행복할 줄 알았던 테레즈와 라켕은 돌연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리도 원하는 결혼을 했건만 죄의식을 극복하지 못 하고 결국엔 그 둘의 자살로 이어지죠.
딱 봐도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온다는 것을 중점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는 극입니다.
근데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그녀의 고향인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서 테레즈 라켕 리뷰들을 주루룩 모아서 정리한 걸 보니 대부분 혹평을 받았더라구요. 물론 키이라 나이틀리야 할리우드에서도 성공한 배우이고, 그녀의 이름 값 덕택에 혹평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팬들로 박스 오피스가 북적일 것 같긴 합니다. (이래서 스타 마케팅, 스타 마케팅하는 거겠죠.)
저는 운 좋게 오프닝 나잇 공연에 초대를 받아서 다녀왔습니다.
제가 불편했던 점들부터 이야기 해볼게요.
1) 극본
에밀 졸라의 원작이나, 이 연극의 세팅이나 모두 19세기 프랑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 영어로 번역하면서 굉장히 21세기적인 대사들을 마구 집어넣은 겁니다. 놀랍게도 평론가들이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진 않았네요. 제가 요새 문학 번역 워크샵을 듣고 있어서 더 문제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고, 꼬투리 잡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언어 발화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테레즈 라켕과 로랑 사이에 전혀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질 않습니다. 이건 배우들의 연기 문제이기도 한데, 일단 극본이 토대가 되니 극본에도 문제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중등 교육 과정에서 주구장창 가르치는 발단-절개-절정-결말의 곡선 구조가 없는겁니다........ 그냥 처음 시작부터 테레즈 라켕은 정말 축 쳐져있는 캐릭터예요. 캐릭터에 애착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원작 소설도 그렇다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각색이었던 만큼 극작가가 조금 더 자유로이 각색할 수 있었던 부분이 아닌가 생각되어 아쉽네요. 더군다나 에밀 졸라의 작품은 이제 저작권이 public domain에 속하는 작품이니까요.)
2) 제발 이름 발음 좀 정해줘!!!!!!!!!!!!!!!!!
제가 영어권 국가 사람들에게 가장 알러지 반응을 나타내는 것 중 하나가 외국어를 무조건 영어화하거나 마음대로 발음한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엔 영어 제일주의 및 귀차니즘으로 인한 문제인 것 같은데... 저한텐 매우 강력한 pet peeves를 자극하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인 친구들은 외국어인데 뭐 어떠냐는 반응이더군요. 그러니 시몬느 드 보부아를 '데 보부'로 발음해서 도대체 무슨 페미니스트 논하는지 알 수 없게 발제를 하지, 싶은 생각도 들었네요 하하하)
적어도 주인공의 이름 정도는 발음을 통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테레즈 라켕인지, 테헤즈 라켕인지, 테헤즈 하켕인지, 터레즈 라켕인지... 제발 좀 정해달라구요. (물론 테레즈 뿐만 아니라 Camille도 카밀로 할건지, 카미유로 할건지, 까미유로 할건지 뭘로 할 건지... Laurent로 로랑인지 로항인지 로헝인지 로렁인지 제발.....)
3) 연기
테레즈의 남편인 Camille 역할을 맡은 배우가 매우 단편적인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도 전혀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았고, 혼령/혹은 테레즈와 로랑의 환각으로 돌아왔을 때도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4) 키이라 나이틀리
언닌 너무 예뻤어요. 비평가 분들이 눈 연기를 잘 한다고 하던데, 저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머나먼 좌석에 앉아서 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문제는 시작부터 딱 느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뭔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자살을 할 거란 걸. 음침 음습 그 자체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으로 만들지 말고 그냥 초상화를 그리는게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적이었습니다.
5) 무대 미술 및 의상
무대 미술은 사실 칭찬해주고 싶었어요. 어느 연극 무대가 무대 위에 강을 구사합니까. 네 저거 영화가 아니라 연극 무대 사진이예요. (제작비가 얼마 들었을지, 저 물 관리하는 스탭들이 얼마나 힘들지는 논의하지 않기로 합니다. 슬프니까)
저 강물에서 뱃놀이 하다가 로랑이 까미를 빠트려 죽입니다. 로랑이랑 테레즈도 그 과정에서 강물에 빠져요. 홀딱 젖어버립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그 장면 바로 다음에 인터미션을 하더라구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다 젖었을 텐데 인터미션 20분 안 되는 동안 정신 없이 키이라의 분장을 맡았을 어시스턴트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근데 의상이요... 무채색으로 너무 가득해요. 키이라 나이틀리는 결혼할 때도 회색 옷이나 베이지 색 입어요. 오죽하면 평론가들이 테레즈가 색깔 밝은 옷을 입기라도 했으면 그녀의 삶을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소리가 나오게 하는 걸까요...
연극 초반에 살짝이라도 밝은 의상을 입혔다면 더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듭니다.
6) 무대 위의 성애 장면들 (19금인가요...?)
네 나옵니다. 키이라 나이틀리 언니가 벗지는 않으시고요. 그래도 성애 행위를 구사합니다. 문제는 전혀 찌릿 찌릿하질 않아요............ 오만과 편견에서 Darcy와 바라만 봐도 찌릿 찌릿한 연기를 구사할 수 있었던 키이라 언니는 어딜 간겁니까?
키이라 언니, 이 눈빛 연기 어디 갔어요, 어디....? ㅠㅠ
영화 <오만과 편견> 중
이건 옷을 벗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요, 연출이 좀 잘 못 한 것 같아요.
제가 세볼려고 센 건 아니고요 -_- 너무 정형적인 성애 장면이 나와서 잊혀지질 않네요.
정확하게 삽입 1, 2, 3, 4, 5번 하고 끝납니다. 네 5초도 안 되서 끝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웃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키이라 언니가 로랑 역을 맡은 배우와 성애 장면을 2번 연기하는데요, 관객들이 빵빵 터져요.
그 장면이 그래야 할 장면이 아니라고요.....
긴장감이 폭발해야 하는 고런 장면인데 다 같이 빵빵 터져요....
7) 무대 사이즈
테레즈 라켕이라는 작품 자체가 대극장에 맞는 희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폭발적이고 긴장감이 가득찬 심리극인데 이걸 대극장에 올리니 티켓 수익이야 올릴 수 있겠지만 그 큰 공간을 쫀득 쫀득한 긴장감으로 채우기란 역실히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무대 미술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소극장에 올렸으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브로드웨이 프로듀서들이 그럴 리가 없지요... 예술성보단 수익이 우선이니까요...
오프닝 나잇 이전에 공연을 관람하셨던 교수님께서는 이 소설 자체가 극화하기 힘든 작품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기대감을 잔뜩이나 낮추고 보았는데도 참 실망감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할리우드 배우가 출연하는 브로드웨이 작품을 오프닝 나잇에 초대 받아서 관람한다는 것 자체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레드 카펫이랑 포토존, 엄청나게 큰 플래쉬 라이트가 달린 카메라들을 들고 즐비하게 서있는 기자 분들도 왕왕 보이더라구요. 시상식이나 되는 양 사람들도 한껏 옷을 빼입고 왔구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20분 인터미션 동안 화장실은 정말 바글바글 거렸습니다. 화장실 줄만 20분 서있어야 했어요 ㅋㅋㅋㅋ 뉴욕 사교계 인사들과 유명 배우들을 볼 수 있는 건.... (이젠 사실 그렇게 신기하진 않아요 ㅋㅋㅋㅋㅋ 뉴욕 길거리에서 조깅하는 할리 베리도 본지라....) 네 뭐 그랬어요.
무대 위에서의 키이라 나이틀리를 꼭 보고 싶으신 분, 브로드웨이에서 무대 미술에 어떻게 돈ㅈㄹ하나 보고 싶으신 분, 테레즈 라켕 연구하시는 분들에게만 추천해드립니다. 티켓 값은 확인해보지 않았는데 오케스트라석이면 또 200불 넘겠죠 뭐... ^^




덧글
아 그리고 정사신 웃기면 정말 답이 안 나오는 것 같아요ㅠㅠ 정말 어렵죠. 무대 위의 magical realism이 불가하다고 믿는 연출가들도 많은데, 정사신이야 말로 정말 이게 현실이라며 재현해도 관객 입장에서 현실이 아니란 걸 아니 웃기기가 쉽긴 한 것 같아요. 아니면 '아하하하' 뭐 이런 불편한 웃음... 이 연극 보고 나서 '연극 무대 위에서의 정사신 어찌 해야 하나'하는 생각 많이 했어요 ㅋㅋㅋ (이러다가 내년에 선배님께 이걸 졸업 논문 주제로 잡았고 마광수 교수님의 자문 구하고 있다고 하는 거 아니겠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