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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 브로드웨이 Hir 리뷰 뉴욕 연극



오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극장 중 하나인 Playwrights Horizon에서 <Hir>라는 연극을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이 극장에서 하는 공연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이번 학기에 본 극 중 최고였다. (읽은 것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Disgraced.)

객석에 앉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촌스럽디 촌스러운 커튼이었다. 원래 커튼이 없는 공간인 것을 알기에 눈에 확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커튼이 열리자 이건 정말 난생 처음 보는 난장판이 등장했다.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그런 난장판이었다. TV에서 본 적은 있다. <2 Broke Girls>라는 시트콤에서 hoarder (물건을 버리지 않고 마구 마구 쌓고 사는 사람을 칭하는 말)의 집이 잠깐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 그런 광경은 처음 본지라 헛웃음이 마구 났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객들이 커튼이 열리자 마자 시각적인 충격에 빵 터지는 순간이었다. 


2 Broke Girls 중 hoarder의 집. 무대 느낌이 대락 이랬다. (무대 사진이 없어 이리 아쉬울 줄이야.)
그냥 '저걸 어찌 저리 만들어놨지'라는 생각만 든게 아니라 '무대 철수팀은 죽었군'하는 생각도 들었다.
매우 극적으로 과장됐지만, 오히려 너무나 과장되서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적으로 보이는 무대였다.



수년간 미국 해병대에서 복무하여 해외에서 전쟁을 치루다 아들인 Issac이 집에 돌아오니 집안 꼴이 엉망인게다. 옷가지가 아무데나 마구 널려있고, 벽에는 크리스마스 때나 볼 법한 휘황찬란한 색깔의 장식들이 마구 걸려있고, 벽장에는 온갖 색깔의 꽃무늬 스티커들이 붙여져 있다. 소파에는 온갖 옷과 이불 등이 널려 있어서 앉아도 될런지 말런지 알 수가 없다. 


거기다 아버지는 해괴한 삐에로 메이크업을 하고 무지개색 아프로 가발을 쓰고 심지어 기저귀를 차고, 여자용 치마 잠옷을 입고 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Issac이 군 복무를 하는 사이에 뇌졸증이 와서 집안에서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신이 나서 집안을 장악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shaky shake"라는 음료를 믹서기에 갈아 마시게 하는데, 이 음료에는 어머니의 비방인 에스트로겐까지 들어있다. 당연히 의사 처방을 받은 건 아니고 아버지를 '더 온순하게' 만들려는 어머니의 특별 처방이다.


거기서 끝인 줄 알았더니, 여동생 Maxine은 Max가 됐다. 즉, 아버지와 반대로 여동생이었던 Maxine은 남성 호르몬 제제를 섭취하며 남자로 성전환을 하고 있다. 


Issac은 전쟁터에서 복귀한 아들을 위해 성대한 파티라도 열릴 것을 기대했는데 돌아와보니 집 구석은 돼지 우리만도 못 하고, 모든 것이 위 아래가 뒤바뀌어 버린 형국인 것이다. 카오스 뿐이지만, 집안은 괴상할 정도로 활기차있다. 특히 어머니 떄문에.


더불어 어머니와 동생은 이제 더이상 he, she, him, her의 이분법적인 대명사를 거부하고 새로운 대명사를 쓰길 요구한다.

He나 she 대신이 "ze." 
Him이나 her 대신에 "hir." 
바로 여기서 제목을 따 왔다. 한국어로는 "히얼"로 발음하더라. 마치 '여기'라는 의미의 "here"와 같이.


모든 질서를 다 금한다고 말하면서도 어머니는 Issac에게 이러한 대안적 대명사 사용과 문법만은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무질서'라는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건조하게 리뷰하다 보니 하나도 안 웃긴 연극 같지만 어머니의 광기 어린 무질서의 종용이 정말 히스테리컬하게 웃겼다. 코미디는 정말 박자가 중요한데, 이 희곡을 쓴 Taylor Mac은 정말 기가 막히게 리듬을 창조해낸 것 같다. 

아들도 그냥 전쟁이 끝나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불명예 제대를 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마약 복용의 이유로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되었는데, 메스를 코로 흡입한 것도 아니고 항문에 빨대를 꼽아 흡입하다가 걸렸다고 한다. (이 마저도 어머니는 코미디로 만들어버린다. 마약 복용에도 '팀 워크'가 필요하냐며. 어떤 여자가 넣어줬냐, 같은 미군이었냐 아니면 현지 여성이었냐, 라는 질문을 하며.)

어찌 보면 이 희곡 속의 가족 구성원들은 전부 다 소수자들이다. 
뇌졸증과 정신 질환을 앓는 아버지. 
경제적 능력이 없고 남편에게 강간을 당한 어머니.
여성이길 거부하고 남성으로 성전환을 하려는 동생.
경제적 능력이 없어 군대 복무를 하다 마약에 중독되어 불명예 제대한 주인공.

주인공 Issac은 어떻게든 집안을 되살려 한다. 난장판이 된 집을 다 정리정돈하고 청소하고, 가족들을 위한 저녁 식사를 요리하고, (남성적) 질서를 재정립한다. 이 모습에 어머니는 아들에게 왜 아버지 행세를 하냐며 질색팔색을 한다. 

그렇지만 Issac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어머니는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겠다며 집을 팔아버린 상태고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까지만 머물 수 있다), 아버지의 병세는 나을 기미를 안 보이며, 어머니는 외도와 강간을 일삼은 남편을 용서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생도 더이상 가족이랑 더이상 살기가 싫고 무정부주의자 게이들의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어한다. 

너무나 웃겼던 극이 순식간에 부모님의 치부를 다 드러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몸싸움을 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막으려다 어머니에게 주먹을 날리게 된다. 어머니는 Issac에 너무나 차갑게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한다. 아들에게 '네가 여기서 자살해버렸으면 좋겠지만, 뒤치닥거리 하기 싫으니, 나가.'라고 매우 차갑게 이야기 하고 Issac은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동생인 Max는 충격에 빠져 어쩔 줄을 몰라하는 와중, 아버지가 소변을 지린다. 
Max가 "He wet himself (아버지가 소변 지렸어요)"라고 하자 어머니가 "Just leave it. Let him rot. (그냥 냅둬. 썩어문드러지게 내버려둬.)"라고 얼음장처럼 말하고 연극이 끝났다. (이 대사는 평생 잊혀지지가 않을 것 같다.)

아버지 캐릭터로 대변되는 기존의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는 이미 무너졌다. 
어머니는 성전환자인 자식(딸->아들)의 가치관과 철학을 횡령하여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려는 듯 하지만, 그마저도 안정적이거나 유지가 가능한 체제가 아니다. 이상적이지도 않고. 

연극 전반부 80% 이상이 블랙 코미디로 너무나 웃겼는데 웃으면서도 이렇게 불편해본 적은 난생 처음이다. 
그런데 너무 많이 웃어서, 마지막 비극이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이런 비극을 감추고 희극인냥 살려고 했다니. 

도대체 그렇다면 이 가족에게 미래란 존재하는 걸까? Issac은 이제 어딜 가야 하나? 동생인 Max는?
이 캐릭터들도 대변되는 내 세대의 소수자들은? 그들에게, 나에게는 미래가 있는 걸까?

숨도 못 쉴 정도로 웃으면서 본 연극이, 숨도 못 쉴 정도로 가슴 아린 결말을 가져다 줄이야.

정말 수작이다. 대다수의 한국 관객들이 공감하기는 힘든 부분도 많을 것 같지만 혹시 뉴욕에서 연극 보시려는 분이 있다면 꼭 보시길 추천한다. 
극본, 연기, 연출, 무대 디자인 뭐 하나 뺄 것이 없이 질투심에 불탈 정도로 훌륭했다.


극작가의 희곡 소개 동영상: https://youtu.be/o-L6qryzKF0

덧글

  • 미이미 2015/10/20 00:09 #

    와 진짜 궁금한 연극이네요! 들려주신 이야기가 완전 흥미로워요ㅎㅎ 뉴욕에서 직접 보게된다면 얼마나 알아들을지가 의문입니다만...
  • zebraorchid 2015/10/20 03:39 #

    꽤나 스펙타클해서 언어를 100% 이해하지 못 하더라도 볼 법한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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